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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와 산다. 그것조차 편견이 생기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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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장 과정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나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들 모두 우리는 생활을 해본적이 없다. 수십년을 우린 생존 싸움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배고픔에 트라우마가 생겼고 나는 배고픈 게 익숙한 사람이 됐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 하기 전 나는 현장실습을 나갔다. 그게 본격적으로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된 계기지만 한 집에 살았을 때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는 건 우리 남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다.


19살 때 나는 옷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20년을 나는 떠돌이처럼 살아야 했다. 20년 동안 15번 정도 이사를 했던 거 같다. 20살에 정식으로 취업 했을 때는 중고 냉장고도 생기고 부엌에 가스랜지와 냄비, 그릇들이 생겼다. 첫 월급 40만원에서 10만원은 어머니께 보내드리고 10만원은 방세를 내고 나머지는 생활비와 나의 첫 살림을 마련하는데 썼다.


나중에 대학을 들어가고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도 나는 계속 혼자 살았다. 살면서 한번도 "가족"이라는 느낌을 갖어본 적이 없다. 지금도 모른다. 드라마를 보면서 막연하게 상상만 할 뿐이다.


어머니와는 설날, 추석 명절에 두 번 만나게 된다. 많아야 일년에 서너번 짧게 어머니를 만나뵈었다. 어머니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이였다. 누구나 가정사에 비극은 있다. 우리집이 남들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힘든 상황일 뿐.


그러다 2년 전에 어머니는 살던 집에서 갑자기 나오게 됐다. 우리 가족은 한 번도 우리 소유의 집을 소유해 본적이 없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작은 집을 사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차였지만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모셔야 되는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준비가 없었다.


나는 시내에 있던 사무실을 정리하고 어머니가 익숙한 이 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20년 만에 한 지붕에서 살게 됐다. 칠순이 넘으신 어머니는 평생 아파트에서 살아 본적이 없다. 그래서 아직도 아파트 생활을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처음엔 늘 수면부족으로 힘들어 하셨다. 층간소음이나 사람들의 간섭, 아파트에 주기적으로 나가야 하는 관리비 등 이전의 생활과는 너무 달랐다.


몇 개월 어머니가 아파트에 잘 적응하시면 나는 다시 독립해서 시내에 사무실을 차릴 생각이였다. 그랬어야 했고. 그런데 계획이 많이 미뤄지고 있다. 어머니는 내가 생각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늙어 계셨다. 냄새를 잘 맡지 못하니 상한 음식을 드시고 한 겨울에도 혼자 있을 땐 난방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있으니 나는 쉽게 집을 나서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잔소리가 늘었다. 상한 음식은 버리고 간은 짜지 않게 하고 혼자 있을 때도 난방을 해야 한다며 어머니께 잔소리를 하고 있다.



이 곳은 내가 학교를 다녔던 곳이라 친구들이 몇 있다. 그리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있어 우린 20년만에 자주 만나 지난 얘기도 하면서 술잔을 기울인다. 그 친구도 내가 금방 집을 떠나 독립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 2년이 넘도록 나는 어머니와 함게 여기 있다.


요즘 뉴스를 보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해 부모에게 얹혀사는 청춘들의 소식을 자주 접한다. 20년을 넘게 떨어져 있다보니 이 친구도 나의 사정을 잘 모른다. 그래서 나를 뉴스에 나오는 그런 시선으로 본다. 어머니 곁을 못 떠나는 캥거루처럼 보인 거 같다.


결혼하지 못한 남자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 이런 편견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편견보다 더 힘든 건 너무 늙어버린 어머니를 두고 다시 독립해 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번은 내 속사정을 어머니께 말씀 드렸더니 요즘은 노력 하시는 거 같다. 운동도 하시고 음식도 가려서 드시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불안하긴 하다. 그렇지만 해야 될 일이 많고 아직 사회에서 한창 일해야 하는 내가 언제나 어머니를 돌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래저래 나에겐 요즘이 너무 힘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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