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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를 보내는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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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를 보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건 하트를 보낼 사람도 없다는 것.

 

요즘 응답하라1994 때문에 스무살 시절이 많이 떠오른다. 대학에 떨어진 나는 원하는 곳에 취업을 하려고 했지만 그마저 쉽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급기야 새벽에 병원으로 실려가 일주일 동안 입원해야 했다.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시작도 하기 전에 이렇게 인생이 무너질 수 없다며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일에 도전하고자 결심했다.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말 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던 내가 학원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다. 돈도 벌고 틈틈히 수능 공부도 할 수 있어서 나에겐 좋은 첫 직장이였다. 처음엔 초등학생들 앞에서 조차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점차 적응해 나는 중고등학생과 성인반까지 맡게 됐다. 그렇게 1년 생활하다 보니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사람들 앞에서서 강의하는 걸 즐기게 됐다. 나는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였다. 대학에서 발표를 할 때도 항상 좋은 성적을 받았고 방청객이 많으면 많을 수록 나는 힘이 났다.

 

복학을 한 뒤에도 여학생들에게 전혀 인기가 없지는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나를 따라다니는 무리들이 있었다. 재수를 했고 입대 시기가 맞지 않아 남들보다 1년 늦게 복학했던 나는 후배들과 4년 차이가 났다. 귀여운 조카들을 보는 거 같았다. 또 그 때는 취업이 우선이였기 때문에 후배들의 고백에 나는 무심해져야 했다. 연애는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학점은 이때가 아니면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어머니 혼자 학비를 대야 했기 때문에 장학금이 절실했다. 어쩌면 나는 학점을 얻었고 사랑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졸업 후 인생의 쓴 맛을 보면서 나는 다시 스무살 전의 소심한 나로 돌아갔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으면 너무 쉽게 무너졌다. 그래서 또 사람들과 멀어졌다. 친구들도 사회 동료들도 그냥 형식적이였다.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게 어려웠다. 두 번의 연애에 실패한 후로는 자발적인 고립이 더 심해졌다. 네이트온 메신저의 노란색 아이콘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우리의 관계를 지속 시켜 준다고 믿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자신 없었지만 외로웠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의 심리적인 관계를 끊지 않기 위해 애썼다.

 

요즘은 카카오톡이 대세다. 사람들은 누구나 카카오톡으로 시공간을 초월해 연락을 주고 받는다. 평소 전화도 자주 하지 않는 내 성격에 카톡이라고 자주 할리가 없다. 내가 자주 연락을 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상대의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 짧은 대화마저도 쉽게 요청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 명 되지 않는다.

 

어제는 문득 카카오톡에 등록 된 친구 목록을 보게 됐다. 많지도 않았지만 대부분은 내가 카톡을 탈퇴하면 인연도 함께 끊어질 사람들이다. 거미줄보다 약한 인연의 끊으로 겨우 연결 된 사람들이다. 나는 이제라도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인연들의 관계를 견고히 할 수 있도록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전부는 힘들겠지만 인연의 고리를 단단히 해서 내게 소중한 사람들로 만드는 일을 지금부터라도 해야 한다. 2008년 내가 스스로 알을 깼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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