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의 내 성격을 보면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닌 듯하다. 내 환경이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 틈에 끼어서 함께 어울릴 수 없었다. 교실 한켠에 우두커니 놓여있는 컴퓨터를 담임 선생님이 갖고 놀아도 된다는 허락 이후로 나는 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게임 팩을 몇 개 갖어다 주셨지만 나는 그것보다 내 손목보다 두꺼웠던 베이직 책에 더 관심이 갔다. 그게 시작이였다.
가끔 등산을 즐기고 있다. 어릴 때부터 산골에 살았던 터라 산이 곧 놀이터였다. 친구가 있던 없던 겨울이면 온 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커서도 산을 오르는 일은 즐거웠다. 그러나 나이 서른이 넘어가니 남자들의 X염색체가 산을 멀어지게 하도록 작동하는 거 같다. 매년 여름이면 전국의 유명산들을 모두 정복하자던 대학 동기들은 이제 연락이 없다.
낚시도 가끔 하는 편이다. 회수로는 10여년이 되지만 내가 잡은 물고기는 열 마리가 될지는 모르겠다. 나는 물고기도 사람도 낚는데는 소질이 없다. 그래서 아직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다.
기타도 배워보고 피아노도 배워보고 취미라는 걸 갖어보려고 몇 번을 더 애써왔다. 결국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것들은 사실 남들 하나씩 다 있다는 취미라는 것이 내게는 딱히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려 볼 생각으로 시작 했었다. 지금까지는 모두 실패다.
내가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고 열정을 갖을 수 있었던 유일한 짓이 컴퓨터였다. 한번도 손에서 키보드를 놓았던 적이 없었다. 군대에 있을 때 조차 요즘 TV에 나오는 도하부대 운전병이였지만 훈련이 없는 날엔 행정실, 전산실 그리고 이웃 부대에서까지 나를 호출하는 일이 많았다.
프로그래밍을 누구보다 좋아했지만 졸업하기 전까지 나는 웹프로그래머가 될거라는 생각은 한적이 없었다. 군대를 가기전까지 인터넷이란 게 없었기 때문에 비주얼베이직이나 포트란, 코볼 같은 언어들을 배우고 있었다. 나중에 델파이, 파워빌더를 따로 배우기는 했지만 IMF 직후였던 그 때 그런 언어들로 취직할 수 있는 회사들은 in서울 대학교 출신들에게 내줘야 했다. 그나마 서울로 취직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인력 파견 업체였다. 증권사나 일본으로 파견 근무하는 것이 그들의 첫 직장이였다. 그 때까지도 일본은 코볼을 사용하는 기업들이 많았지만 일본의 대학생들은 더 이상 그런 구식 언어를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인력이 많이 파견 됐었다.
회사도 다녀보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봤지만 프로그래밍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떨쳐버리지 못했다. 모두 정리하고 다시 시작한 게 웹프로그램이였다. 경기가 많이 어려웠던 때라 온라인 쇼핑몰 창업이 인기였다. 그래서 책을 사서 웹프로그래밍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웹프로그램은 수요가 많다. SI는 기업거래기 때문에 시장이 제한 돼 있지만 단가가 높았고 웹은 인터넷 환경에 노출 된 모든 사람들이 거래처가 될 수 있었다. 보험 영업 사원도 거래처였고 중소기업 사장님도 거래처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했다.
누구나 거래처 고객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웹프로그래머를 가볍게 본다. 기업 상대 거래와 개인 상대 거래는 사회적 인식의 차이가 컸다.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직업인지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일도 이젠 지겨워졌다. 30만원에 쇼핑몰을 만들어 달라는 사람들, 홈페이지를 삼성전자처럼 만들어 달라는 사람들, 옥션 같은 오픈 마켓을 만들고 싶은데 일주일이면 되냐던 사람들, 아직 끝나지도 않은 작업인데 새벽에 전화해서 오타 수정 해 달라는 사람들, 내일 마감하기로 했는데 마음에 안 든다며 다시 만들어 달라는 사람들, 나는 웹프로그래머인데 2D 설계도를 스캔해서 입력하면 3D 입체 형상으로 변경 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며 강짜 부리던 사람, 세 시간을 달려서 갔더니 로그인도 안하고 왜 관리자가 글을 못쓰냐 던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완전히 지쳐버렸다.
남자들은 처음 보는 남자의 직업을 궁금해 한다. 웹프로그래머라고 소개하면 그들의 선입견에 맞춰 이해하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홈페이지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면 쉽게 받아들인다. 자기소개가 끝났을 때 간혹, 마침 내가 홈페이지 만들고 싶었던 게 있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 홈페이지를 만들려고 하는데 연락처 좀 달라고 하면 사실 겁난다. 좋은 인연으로 만나서 악연으로 끝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웹프로그램은 다른 프로그램들과는 다르게 생활 밀착형이 많다. 그래서 좋은 교감을 갖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무엇보다 좋은 직업이 될 수 있다.
지금은 체력이 많이 달려서 힘들지만 보통은 하루에 10~12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다. 그 시간 내내 일만 하는 건 아니지만 의뢰받은 프로젝트를 하게 될 때는 하루 12시간도 부족할 때가 많다. 일도 힘들지만 홈페이지를 오픈하고 잔금을 받아야 되는 날이 되면 개발자들은 별탈 없기를 기도한다. 잔금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오로지 의뢰인만 알고 있다. 많은 개발자나 웹에이전시들이 잔금을 떼이는 일이 흔하기 때문에 우리들 세계에서 잔금은 복불복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계약금만이라도 많이 받아내려고 애쓰고 있다. 10년이 넘어가는 실력있는 개발자들이 이 바닦을 떠나는 첫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에 대한 대가는 복불복이고 사회에서도 IT 노동자의 이런 열악한 인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먼저 떠나는 사람이 용기있는 사람이 된다.
"하고 싶어 하는 일이니 돈은 조금만 받아라"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이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맞다. 웹프로그래머로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든데 나는 왜 떠나지 못하고 있나. 몇 년 다른 길을 가보기도 했지만 나는 컴퓨터 앞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일이 좋다. 그런데 돈은 내 노력만큼 벌기가 어렵다.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내가 의뢰인보다 더 영악해지면 된다. 실제로 Ctrl + C → Ctrl + V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몇 배의 돈을 벌어가는 프리랜서도 있다. 이 사람들은 프로그래밍 능력보다 영업 능력이 탁월하다. 계약서를 쓰고 의뢰인을 설득하는 재주가 남다르다. 저런 사람이 무슨 개발자야, 영업맨이지 하면서 뒷담화를 하지만 사실 부럽다. 마음 먹고 의뢰인을 홀려 단가를 뻥튀기한 적도 있긴하다. 그럴 때면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잠자리가 편치 않다. 결국 내가 또 손해를 보고 만다.
내 노력의 대가를 누가 챙겨주기를 바라는 것도 비겁해 보이긴 한다. 앉아서 하는 일이 왜 이렇게 비싼지 모르겠다 하던 의뢰인에게 나는 독하게 한 마디 쏘아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또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될까봐 겁내하고 있다. 어쨌든 내가 극복해야 될 부분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손가락만 까딱거리는 일이니 쉬워보일 수 있다. 그래서 남들처럼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는 직업이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한다. 박명수 어록 중에 "공부 안 하면 추울 때 추운데서 일하고 더울 때 더운데서 일한다"는 말이 있다. 추울 때 따뜻한데서 일하고 더울 때 시원한데서 일하지만 공부 많이 했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이 프로그래머이기도 하다.
요즘 개발자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학생들이 프로그램을 더 이상 공부하지 않는다. 이공계를 진학하는 이유가 공무원 시험에서 가산점을 받기 위해서라고 한다. 개발자 품귀 시대라고 하는데 개발자 몸 값은 왜 10년 전만 못한 것일까. 배추도 품귀면 값이 오르는데...
'느낌이 있는 풍경 > 프리랜서로 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닭집 사장은 되고 싶지 않은 웹프로그래머 (0) | 2013.10.17 |
---|---|
프로그래머 3, 4년차에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 (0) | 2012.10.17 |
쇼핑몰 후기 조작, 이미 상식으로 자리 잡은지 오래 (0) | 2012.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