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보는 쇼핑몰에서 마음에 드는 상품을 찾았다면 일단 이 쇼핑몰이 믿을만 한 곳인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싶어진다.
페이지 하단의 사업장 주소와 대표자 이름, 통신판매번호 모두 이상 없어 보이지만 그것만으로 객관적 신뢰를 얻기란 어렵다.
그래서 사용자들이 많이 의존하는 것이 자유게시판이나 이용후기다.
안타깝게도 이런 게시판은 쇼핑몰 컨텐츠 중 가장 관리자의 조작이 간단한 장치다.
웹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한게 이제 만12년이 됐다.
원래는 SI나 시스템프로그래밍을 하고 싶었지만 웹프로그래머가 되기까는 우여곡절이 많다.
프로그래밍의 세계에 발을 들인 30년 중 12년은 적지 않은 세월이다.
내가 프리랜서를 하겠다고 선언한 후 처음 받은 일이 쇼핑몰이였다.
서울에 있는 꽃집이였는데 이 쇼핑몰을 의뢰받고 다음 날로 서점에 가서 PHP 책을 사서 공부를 시작 했다.
1주일 꼬박 밤을 세워 웹프로그램을 공부하고 또 1주일 꼬박 코딩을 하고 나서 쇼핑몰 비슷한 걸 만들어 냈다.
그런데 꽃집 사장님의 요구사항이 장마철 하늘만큼이나 변덕 스럽다.
잘 운영하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화가 온다.
그래도 그 땐 혈기 왕성한 청춘이였다. (2000년 무렵)
여러 사람들을 겪다보니 나도 조금씩 약아질려고 한다.
프리랜서 1년만에 큰 건수가 들어 왔다.
최선을 다해 프로그래밍을 해서 납품 했다.
오픈 다음 날 처음으로 수정 의뢰가 들어왔다.
이용후기와 질문 게시판에 IP가 보이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 때는 게시판에 글을 쓰면 글쓴이의 IP가 일부 노출 되는 것이 관행이였다.
너의 IP를 알고 있으니 악플을 달지 말라는 의도가 숨어있다.
그런데 관리자가 먼저 그 IP를 보이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직원을 시켜 이용후기와 게시판에 글을 채우려고 하는데 IP가 노출 되니 한 사람이 글을 쓴게 티가 난다는 것이다.
뭔가 찝찝한 마음은 들었지만 잔금이 들어오지 않은 상황에서 甲은 절대적인 존재다.
그게 10년 전이였다. (2001년 무렵)
한번은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곳에 쇼핑몰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임대몰이 유행하던 때라 제작비는 과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의욕은 떨어졌지만 그 일이라도 해야 하는 형편이다.
물론 게시판의 IP 노출은 없고 관리자가 임시 아이디를 쉽게 만들 수 있는 기능도 요구사항에 있었다.
한 명의 직원이 열개의 아이디를 만들어 후기를 올려도 사람들은 조작 사실을 쉽게 알아내기가 어렵다.
이번 일까지만 하고 이젠 쇼핑몰 만들지 말자며 결심 하게 된다.
그게 6, 7년 전이다. (2001년 무렵)
쇼핑몰 전문이라고 홍보 했는데 쇼핑몰을 안 만드니 일이 없다.
일반 홈페이지 제작을 하려니 디자이너 구하기도 어렵고 단가도 너무 낮아 외주 제작을 맞길 수도 없어 프로그래밍 일을 접고 매형을 따라다니며 감자떡과 옥수수 장사를 했다. (2003년 무렵)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나는 다시 이 판으로 들어왔다.
물론 의뢰인들은 황당한 요구사항을 빼놓지 않는다.
이들은 쇼핑몰을 오픈 하면서 구매자는 사기꾼이라는 전제를 두는 거 같았다.
아이디와 IP에 구애 받지 않고 게시판과 후기를 조작 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은 이젠 쇼핑몰 기본 기능이 됐다.
낚시 용품을 판매하던 업자를 만나고 나는 다시 이 바닦을 잠시 떠나게 된다.
그 때는 개인정보보호정책의 필요성에 대해 간간히 말이 나올 때였다.
아이디, 암호화 되지 않은 비번,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를 한 줄에 편하게 확인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비번과 주민등록번호는 암호화 되어 저장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해 줄 수 없다고 하니 프로그래머가 왜 그걸 못하냐고 한다.
잔금이 70% 남았지만 그렇게는 못한다며 계약을 취소 했다.
돌아온 답변은 나를 사기로 고소하겠다는 것이다.
처음 비슷한 문제로 고소 당했을 때는 경찰서 문턱이 지옥문 같더니 두 번째 부터는 여유가 생긴다.
그 때는 개인정보보호법이 없어 어의 없는 고소를 당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 때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금방 취하를 한 것으로 봐서 겁을 주려고 했던 거 같다. (2005년 무렵)
부동산중개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땐 실명인증에 전화번호 인증까지 받고도 주민등록번호와 비번을 암호화 하지 말라는 요구를 받았다.
실명인증까지 했는데 주민등록번호를 확인 할 일이 뭐냐고 하니 경쟁 업체가 들어 올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나는 그가 회원의 아이디로 로그인 해서 어떤 매물을 열람했는지 확인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동산중개 업소는 생각보다 많은 주민등록번호를 보유하고 있으면 매일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다루기 때문에 그것이 개인정보로써 보호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하다.
아무리 관리자라 하더라도 비번과 주민등록번호는 노출 시켜 줄 수 없다고 하니 이 동네에서 일 못하게 만든다며 협박을 했다가 다른 업체도 소개 시켜 주겠다며 회유도 했다가, 꽤나 힘들었다.
결국 인근에 내가 사기꾼으로 소문이 돌긴 했지만 신경은 쓰지 않는다. (2009년 무렵)
그 후로 주문형 쇼핑몰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ERP나 예약 프로그램 등을 만들었다.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일이 버거워 업체나 관공서의 하청 일을 받기도 했는데 역시 쉬운 일은 없었다.
지금도 간간히 사이트의 여러가지를 조작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온다.
게시판에 글 쓸 때 날짜를 직접 입력 하게 해 줄 수 있냐며 문의 하는 고객도 있다.
유혹이 있는 건 당연하다.
이제 처음 오픈 했는데 개발자의 축하 인사 밖에 없는 썰렁한 쇼핑몰에 사람들이 믿고 물건을 구매 할리 없다.
그렇다고 편법이 해답은 아니다.
이번에 연예인 쇼핑몰 후기 조작 사건을 보면서 옛날 일들이 떠오른다.
아이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주부가 있었다.
남편 출근하고 아이가 학교가면 마땅히 집에서 할일이 없어 인터넷 카페를 가입하고 같은 처지의 주부들과 친분을 쌓게 됐다.
그러다 아이가 입지 않는 작은 옷들을 교환하게 됐는데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중고 옷 판매 쇼핑몰을 시작 했다.
처음엔 아이 옷만 했다가 서서히 쇼핑몰이 자리 잡으면서 어른 옷까지 넓혔고 매입 한 중고 옷 중에 상한 것이 있으면 직접 수선을 해서 그만큼 저렴한 가격에 판매 했다.
아파트에서 소일 거리로 시작한게 직업이 됐다.
쇼핑몰을 할 때 오프라인 인맥도 중요한 법인데 사람들은 큰 돈을 들여 온라인 키워드 광고를 하고 스팸도 보내야 하고 낚시성 글들도 꾸준히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게 겉 치장은 될 수 있지만 언젠가는 벗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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