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미륵산
버스를 타고 미륵산을 가기 위해서는 문막과 흥업으로 가는 길이 있다. 원주나 문막에서 53번 버스를 타면 궁촌리, 비두리, 귀래면 운계리까지 가게 된다. 서낭당 고개를 내려오는 샘터가든 앞 정류장에서 내린다. 원주나 흥업에서 31번 버스를 타면 역시 이곳 샘터 앞 정류장에서 내리게 된다. 여기서 등산로 입구까지(경천묘) 약 2Km 정도 되는데 도보로 이동해야 할 듯 하다.
자가용을 이용 할 때는 문막 → 궁촌리 → 비두리 → 운계리 → 주포리 → 경천묘 경로가 있고 흥업 → 천은사 → 운계리 → 주포리 → 경천묘로 가는 방법이 있다. (밑줄을 클릭하면 다음 로드뷰를 볼 수 있음) 남원주IC를 이용해서 흥업을 지나서 갈 때는 로드뷰에서는 충주로 이어지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부분 개통했을 때여서 사진을 볼 수 없지만 지금은 모두 개통 되서 천은사 분기점에서 내려 운계리까지 갈 수 있다. 등산로 입구는 황산마을, 황산사, 경천묘, 문막 궁촌리 등 여러 곳이 있고 난이도는 모두 차이가 있다. 이번에 탐방한 경천묘 코스는 가까운 거리만큼 경사가 심해 눈이 있는 겨울에는 장비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이번에 탐방한 코스는 경천묘 → 황산사 → 미륵불까지가 되겠다. 목표는 미륵산까지였으나 정상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고 바위에 얼음이 얼어 붙어 위험하고 나홀로 산행이라 진달래가 피면 다시 오기로 기약하며 미륵봉에서 발길을 돌렸다. 미륵봉 역시 기암괴석으로 경사가 심하고 얼음이 있어서 기어서 올라야 했다.
등산로는 왼쪽으로 표시 돼 있지만 오른쪽 넓은 길로 가더라도 100m 앞에서 만나게 된다.
오르는 길 곳곳에 작은 돌탑들이 있다. 나도 돌 하나를 올려 놓는다.
등산을 하기에 하늘은 더 없이 푸르고 맑았다. 이때만 해도 나는 봄날을 만끽하며 입고 있던 겉옷을 한 꺼풀 벗었버렸다.
승려의 사리를 모셔 둔다는 부도탑(승탑)이 나온다. 한자로 서응당, 학서당라 씌어 있는데 아마도 황산사의 승려가 아닌가 싶다.
황산사 아래에 작은 계곡을 건너기 위한 돌 다리가 있다. 요즘은 흔히 볼 수 없는 원석을 뉘어 만든 돌다리가 아기자기함 마저 있다. 이 다리는 해탈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한다.
황산사까지 길을 안내하는 등이 나홀로 등산에 동행이 되어 준다.
옛 황산사 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
탑 오른쪽으로 계단을 만들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했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길은 따로 있었다.
지금의 황산사는 옛 터에 천막으로 지어진 법당이 있다.
이 돌 벽을 봤을 때 절터가 이 곳인가 했는데 경천묘 관리인의 말을 빌리자면 경순왕을 모셨던 사당 터로 추정 된다고 한다. 지금의 경천묘를 건축하기 전에 작은 사당을 지어 경순왕을 모셨다고 하는데 이 곳이 사당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처음 마주하게 되는 바위 절벽, 이 절벽 앞에서 일단 쉬어가기로 했다. 이미 다리에 힘이 빠진 상태였지만 군 시절을 생각하며 열심히 밧줄을 타고 올랐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 했다.
계단이 보인다. 이제 정상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 하다. 몇 번을 나눠 쉬며 한 계단씩 천천히 오른다.
경사가 80도는 되는 거 같다. 미륵불까지 오르는 계단은 가파르고 미끄러워 아래를 보기가 겁날 정도다. 봄날은 가고 이 곳은 아직 한 겨울이다.
드디어 미륵불 앞에 섰다. 얼굴은 양각으로 조각 되었고 몸과 연꽃은 음각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볼 수 있다. 부드럽고 화려한 선 위에 온화한 불안을 볼 수 있다.
미륵불 위에서 바라본 전망. 황산마을을 지나 멀리 귀래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하늘도 파란게 지평선 넘어에 다시 수평선을 보는 것 같다.
미륵불에서 미륵봉까지 오르는 길은 순탄치가 않다. 바위 절벽을 밧 줄 하나의 의지해 올라야 하는데 정상에는 얼음위에 다시 눈이 내린 상태라 매우 미끄러웠다. 이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서낭당고개 아래 샘터에 들러 목을 축인다. 인근 주민이 물을 받고 있다.
경순왕 경천묘
경천묘로 들어서는 신문. 신문에는 문이 세 개가 있는데 사람은 항상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가운데 문은 신이 다니는 문으로 제례가 있을 때 개방하게 된다. 사람이 다니게 되는 양쪽 문은 높이가 낮은데 廟에 들어설 때는 경건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의미란다.
경순왕의 후손 경주김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는 경천묘. 경천묘는 관리하는 분이 있어 친절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경천묘(敬天廟)는 무덤이 아니라 조상이나 왕을 모시는 사당이라고 한다. 관리하는 분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3종류의 사당이 있는데 왕을 모시는 사당, 장군을 모시는 사당,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고 한다. 묘(廟)가 바로 한자로 사당 묘라고 한다.
신라 마지막 왕이였던 경순왕은 왕권은 약화되고 나라는 부패 해 백성의 궁핍과 원성은 점점 높아져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고 경애왕(경순왕의 부)을 죽인 견훤의 백제에 대항 할 수있는 군사력도 약화 돼 고려에 신라를 넘겨주고 이곳에 머물며 황산사를 창건하게 되고 미륵불을 조성했다 한다. 여주와 충주에 자손이 있었지만 나라를 넘겨주고 오는 왕이 무슨 염치로 후손을 대할 수 있냐며 이 곳, 귀래에서 머물렀다 한다.
경순왕은 개성에서 최후를 맞게 되었고 후손들은 신라의 왕들이 모셔진 경주로 이장하려 했지만 고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박 100리를 벗어 날 수 없다 하여 지금의 경기도 연천에 모시게 됐다 한다. 아마고 고려는 마지막까지 경순왕에게 왕의 예우를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아들인 신검에 유폐까지 당했던 견훤을 받아들여 보호하고 예를 다했던 왕건은 대인배 중에 대인배가 아닌가 싶다.
귀래는 귀한 사람, 즉 경순왕이 오셨다 해서 귀래(貴來)라는 지명이 됐다고 한다. 이 때가 935년 경이라고 하니 천년이 넘는 꽤나 오래 된 지명이다. 횡성 어느 마을에 가면 원터라는 지명을 갖은 곳이 있다. 원님이 머물렀던 자리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혀지게 됐다고 한다. 하물며 왕이 머물게 되면서 유래 된 지명을 갖은 귀래 주민들에겐 경천묘가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제례를 지낼 때는 초상화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평소에는 이렇게 닫혀 있다.
경천묘 입구에는 원주8경, 유적지를 안내하는 소책자가 비치 돼 있다. 누구나 한 부씩 갖고 올 수 있다.
미륵산을 내려 오면서 보게 되는 눈을 찌프리게 만드는 모습들이다. 산불 위험이 있는 곳에서 불을 피운 흔적과 쓰레기를 쌓아 놓은 모습이다. 또 경천묘에서는 사당의 마루에까지 신발(등산화)를 신은 채 들어갔던 자국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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