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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막 조엄 묘역(趙曮墓域)을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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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엄 선생의 모역은 2000년 11월 18일 강원도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다. 1763년(영조 39)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쓰시마섬[對馬島]에 들러 고구마의 보관법과 재배법을 익히고 그 종자를 가져온 문익공 조엄의 묘역이다. 그의 후손 7대가 연이어 판서(判書)를 지냈다 하여 작동(爵洞)이라고 불리는 마을에서 북쪽으로 700m 떨어진 동산에 자리잡고 있다.  (두산백과)


조엄 선생하면 많은 사람들이 고구마를 연상하게 된다. 역사 시간에 한 줄 기록으로 암기했던 역사의 현장이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마음을 먹고 들리게 됐다. 일본 통신사로 갔을 때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서 고구마의 종자와 재배법을 들여와 백성의 기근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혹자는 감자도 조엄 선생이 들여온 것이라 하는데 감자는 신라 문무왕(13)이 일본에 조공했었다는 기록이 일본의 역사서에 기록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훨씬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흥정사에서 소장 중인 `한사내빙도' 중 조선통신사 조엄


간현에 들어서기 전 골프장과 스키장을 갈 수 있는 방향이라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은 길일 거 같다.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문막 간현 유원지의 길목에 있다. 문막 의료기기공단에서 서원주역사를 지나 예전 철도 아래를 지나 월송리 방향으로 향한다.

로드뷰에서 볼 때는 좁은 도로이지만 최근 도로 정비를 마쳤기 때문에 포장 된 편도 1차선 진입로가 연결 돼 있다. 좌회전해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기념관 주차장을 볼 수 있다.

조엄 묘역 기념관의 주차장은 제법 넓다. 2013년 하반기 정비 사업을 마칠 예정이였는데 8월 31일 현재도 공사는 완료되지 못하고 있다. 관리인이 상주하는 듯 하나 안내표지나 책자를 구하기는 어렵다. 정비를 모두 마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기념관은 제법 멋스럽게 지어졌다. 유물전시관으로 쓰여질 예정이라고하는데 아직 개관은 하지 않은 상태이며 1년 정도 더 준비하면 유물을 관람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멀리 사당이 보이고 앞에는 고구마 밭이다. 밭은 크지 않았지만 조엄의 고구마를 연상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조엄선생의 사당. 신문이 굳게 닫혀있다. 하반기에 정비사업이 완료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기다렸다 방문했지만 아직 준비는 미흡해 보인다. 귀래 경천묘 방문의 기억을 되새겨보면 양쪽 작은 문은 사람이 다니는 문이고 가운데 문이 신문(神門)이라 해서 신이 다닌다고 한다. 평소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양쪽 문은 열어두게 되는데 사람은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나를 기준으로 오른쪽 문을 이용하게 된다. 즉, 사진에서 볼 때 들어갈 때는 오른쪽 문을 이용하고 나올 때는 왼쪽문을 이용해서 출입하게 된다. 오늘은 신문이 닫혀 있어 내부를 확인 해 볼 수는 없었다.

사당 앞에 아기자기하게 조성 된 작은 공원이 있다. 둘러보면서 작은 문화 행사를 치루기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념관과 사당은 주변 풍경과 잘 어울려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신당 내부는 잡초가 무성하다. 추석을 맞아 정비를 하겠지만 조금 이른 시기에 찾은 게 아닌가 싶다.

사당 왼편 산 아래로 이어지는 묘역을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 본 사당의 뒷편 풍경이다.

사당 뒷편에 자리한 조엄신도비. 설명에는 헌종 1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비석의 내용을 김이재가 썼다고 기록되었지만 이름이 한글이라 정확히 누구의 것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에 역사 인물 중에 안동 김이재(金履載)를 찾을 수 있는데 헌종 때 의금부판사를 지냈다고 한다.

신도비에서 조금 더 오르다보면 왼쪽에 비석은 없고 비석 지붕만 남겨져 있는 자리가 있다.

조엄 묘역 아래에 인공으로 조성한 작은 연못이 있다. 그 위로 작은 수로가 이어지는데 농업용수로 사용하기엔 규모가 작고 관상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엔 잘 꾸며졌다고 할 수 없다. 조엄묘역이 있는 이 마을 앞에는 물이 흐르는 개천이 없어 아마도 풍수지리를 맞추기 위해 조성한 듯 하다.

조엄선생의 묘는 소탈하지만 위엄있게 자리하고 있다. 내내 흐렸던 날씨가 선생의 묘 앞에 다다르자 해가 구름을 걷어내고 밝게 묘 주변을 호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들어오게 된 해가 1763년이라고 하니 생각보다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농토가 비옥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기근을 해결하기 위한 구황작물은 매우 중요한 식량이였다. 대표적인 구황작물인 감자, 옥수수, 고구마 등은 조상들이 외국에서 들여오게 되는데 조엄 선생이 그 중 하나인 고구마를 들여오게 되면서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게 됐다.

조엄 선생의 본관은 풍양(지금의 경기도 양주)이고 고구마 종자를 들여와 처음 재배하게 한 곳은 제주도인데 어떻게 문막에 선생의 묘를 쓰게 됐는지는 역사적인 자료를 찾지 못했다. 기념관에서 관련 된 자료나 설명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 했지만 다음으로 미뤄야 할 거 같다.


조엄 선생은 역사적으로 매우 훌륭한 인물이며 업적 또한 작지 않다. 정부, 강원도, 원주시에서는 지금에 와서 기념물 관리에 예산을 지원하고 있어 다행이지만 현재 탐방객을 위한 유적지 안내가 필요해 보인다. 많은 사적지를 다녀 본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역사적 인물에 관한 유적지는 후손들이 관리해 오다 차 후에 지자체에서 관리 지원을 하는 경우가 많다. 관리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보니 예산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예산은 낭비되고 유적지가 방치 될 때가 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지역 사회에서 꾸준한 관심을 갖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기념관 좌측으로 묘역으로 올라서는 계단이 짧게 있지만 기념관부터 묘까지 200여 m는 진입로가 정비 되지 않아 풀이 무성해 유해 곤충이나 뱀의 출현이 우려된다. 학습 방문을 위해서는 봄이나 늦은 가을쯤이 좋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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